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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향수 찾기

향수찾기







최근 5일 정도 잠을 설쳤다. 거울을 보니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눈에 핏발이 서있었다. 아무리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누워도, 아무 이유 없이 잠이 오질 않으니 정말 미칠 노릇이다. 한때 수면유도제를 달고 살았을만큼 고질적인 불면증을 앓고 있는데, 그냥 신경이 예민해서 그렇다고 넘어가기에는 생활의 질이 팍 떨어질 만큼 괴로운 일이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조금 변화를 주기로 했다.



잠이 안 오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몇 가지 해답을 얻었다. 

우선 공간이 답답하면 안 된다. 늦은 오전이나 오후의 낮잠처럼, 열린 창문이라든가 베란다문으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잠이 잘 온다.

다음으로 정신을 쏙 빼놓을 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내 룸메이트는 바닥에 뒷통수만 닿으면 잠드는 사람이었는데, 늘 잠못드는 나에게 이런 조언을 한 적이 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마." (하긴 정말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긴 했)

그런데 그게 맘대로 되나. 스스로 머리를 비웠다고 생각할 때 즈음 발끝의 감각부터 머리를 풀어헤친 모양까지 모든 것이 신경쓰이기 시작한다. 이 때 유용한 것이 바로 향수다. 자기 전에 내 맘에 드는 향수를 뿌리면 취한 것같은 기분 속에 심신이 편안해지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기때문이다. (참고로 나에게 라벤더 같은 건 효과가 1도 없다)



쓸만한 걸 찾기 위해서 백화점, 로드샵, 향수전문점까지 여기저기 쏘다니며 시향을 하고 향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기억에 남은 향수들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록해두고, 이걸 참고로 해서 앞으로 구매를 해봐야겠다.


상콤달달 러블리 20대 새내기 분홍색 이런 건 내 취향이 아니다. 아~주 질색이니 제쳐두고,

그린 플로럴이나 구어망드, 베티버 향을 중심으로 찾아보았다.

색깔로 치자면 하얀색, 그리고 옅은 초록색이나 옅은 보라색의 향이 내 취향이다. 물향도 좋아한다. 마린노트 말고 오이나 비의 물향.








아쿠아 디 파르마 AQUA DI PARMA


피코 디 아말피






무화과향이라고 소개를 받았다. 아말피의 피그... 무화과가 이탈리아어로 피코인가?

내가 좋아하는 무화과향 향수인 딥티크의 필로시코스와 대조해서 이야기하는 게 편할 것 같다.

필로시코스가 주로 무화과 '열매'의 향이라고 한다면 이건 싱그러운 무화과 나무가 있는 '풍경'에 가깝다.

무화과 열매가 열린 나무의 파릇하고 싱싱한 잎사귀, 그리고 그 잎사귀에 내리쬐이는 햇빛이 포함되어있어 상큼하고 상쾌한 느낌이다. 더운 여름날 기분 전환을 하기에 아주 좋을 것 같다.

시원한 계열의 향이니만큼 오래가는 편은 아니다.


미르토도 시향했으나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는 향이라서 패스함.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지하 2층)에서 시향했는데 설명이 명쾌하고 친절하셨다.





세르주루텐 

라 휘 드 베흘랑







아... 저 리뉴얼된 라벨 정말 마음에 안 든다. 그전것이 다른 향수 브랜드들의 라벨과 겹치는 디자인이라서 바꿨나? 좀더 강렬하고 감각적이긴 하지만 이쁘진 않네. 


이 향수는 향수가 품고 있는 차가운 이미지와 함께 수색이 예쁜 것도 인기에 한 몫 할 것 같다. 참 맡아보고 싶게 생겼다. 하지만 처음 시향했을 때는 참 마음에 안 드는 향이었다. 세르주루텐의 향수들이 대체로 사람이 아닌 물건에서 날 법한 향이라 몸에 뿌리기엔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두번째로 맡아보고 처음과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라 휘 드 베흘랑에는 날카로운 금속성의 장미향기가 있다. 처음엔 이게 인위적이고 어색하다고 느꼈는데 다시 맡아보니 자꾸만 관심이 간다. 점점 좋아진다. 그런데 이 향기를 오래도록 맡고싶다는 생각이 들 때 쯤... 사라져버린다. 날카로운 느낌이 조금 날아가버린 자리를 평범한 잔향이 채운다. 잔향에서도 금속성의 느낌을 유지하긴 하니까 평범하다고 할 순 없지만, 그 차가운 꽃향기가 오래 지속되었다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그리고 세르주루텐은 지속력이 좋은 걸로 알고있는데, 라 휘 드 베흘랑의 경우에는 평범했다.(내 피부에서만 그런 걸 수도 있다).


사람이 풍기기에 어색한 향인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좋긴하다. 그 금속성의 향기가.


로르 프린느와 상탈 마제스퀼도 시향했는데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로르 프린의 그... 인센스...;;

잔향에선 인센스 향기가 꽤 매혹적이긴 하지만... 탑과 미들에서는 탐탁지가 않다. 사람이 뿌릴 만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방에서 디퓨저로 쓸 진 몰라도 나한테 뿌리고 싶진 않은 향이다.


신세계 강남점으로 갔는데 예전(2년 전 쯤?)과 다르게 친절해서 좋았다. 직원분께서 내가 좋아할만한 것을 고려해주시고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적극성으로 추천해주셔서 감사했다. 백화점을 여러곳 돌아봤지만 언제나 롯데백화점이 제일 친절했예전에 방문했던 신세계에서는 안 좋은 인상을 받았는데 지금 계신 직원분은 아주 친절하심.


 





에따 리브흐 도헝쥬

디벙 앙팡






맡자마자 아 이건 내 취향인데? 왜이리 친근하지?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집에 가서야 기억이 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수, 구어망드 향수를 좋아하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는 티에리 뮈글러의 '엔젤'과 상당히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엔젤에서는 달게 졸인 체리의 향기가 좀더 난다. 음식(디저트)의 느낌이 좀더 강하게 들어가있다. 또한 엔젤의 이미지가 주변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강한 개성을 발산하는 사람이라면 디벙 앙팡은 눈치 있게 개성을 좀 누그러뜨린 느낌이다. 자기 마음에 안 들 경우 엔젤은 아주 냉정하게 정색을 할 것 같은데, 디벙 앙팡은 '하핫^^' 정도는 해줄 것 같은 그런 이미지.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부담없이 쓸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계열 자체가 진입장벽이 높은 향이라서, 아무리 엔젤보다는 덜하다고 해도 호불호가 강할 건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또 하나 차이가 있다면 잔향이다. 이름에 enfant가 들어있는 향수답게 잔향에서 아기 분내가 묻어난다.

아기 분내가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고, 스윽하고 볼을 내미는? 쓰다듬었더니 손에 묻어나는 그 정도이다.

엔젤보다는 너그럽지만 여전히 개성있는 향수.

언젠가 엔젤이 단종된다면 그 슬픔을 이걸로 달랠 수 있지 않을까... (T_T)







힐리 

피귀에







딥티크의 필로시코스같은 스타일의 무화과가 마음에 든다면 이 향기도 좋아할 것이다. 바로 내가 그러함. ^_^

필로시코스는 향이 약한 편이라 뿌린 뒤 얼마 안 되어 희미해지는데, 이건 sillage가 꽤 좋다. 움직이거나 바람이 불 때마다 편안한 무화과 향기가 솔솔...

필로시코스와의 차이가 있다면, 필로시코스는 미끄덩하고 향을 점액질에 풀어낸 것 같은... 그런 물컹물컹한 느낌이 강한데(코코넛때문인가?) 피귀에는 좀 덜 물컹물컹하다. 안 물컹물컹한 건 아니고 '덜'하다. 정도의 차이일뿐 질감 자체는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필로시코스보다 싱그러운 잎사귀의 향, 프레시한 향기가 얇게 나타난다.

필로시코스의 지속력과 시야쥬가 아쉬웠던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뿌린지 이틀이 지난 시향지에서도 분명한 잔향이 올라온다. 사진과 달리 수색이 갈색이고 종이 스티커로 된 라벨이 붙여져있다.




라티잔 파퓨머

프흐미에 피귀에 엑스트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올리비아 지아코베티가 최초로(프흐미에) 개발한 무화과향 향수인 라티잔 파퓨머 '프흐미에 피귀에'의 익스트림 버전이다.

피코 디 아말피처럼 상쾌하지도, 필로시코스처럼 물컹거리지도 않으며 은은한 품위가 느껴진다. 햇살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무화과 나무의 열매와 이파리 하나하나가 보이는 것 같다. 섬세하고 예쁜 무화과향무화과로 만든 보석 장신구(?)를 찬 기품있는 여인도 떠오른다입자와 질감이 아주 고운 느낌이며 반짝반짝하다.

그러나 내가 사용하기에는 연령대가 좀 높다. 곱게 나이가 든 여인, 적어도 30대 중후반이 적당할 것 같다. 




에따 리브흐 도헝쥬, 힐리, 라티잔 파퓨머는 모두 '메종드파팡'에서 시향했다. 내가 선호하는 노트와 느낌을 말씀드리니 추천할 만한 향수들을 챡챡 꺼내셨는데, 하나하나 친절하고 사려깊게 설명해주시고 시향과 착향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서 감동했다. 향수를 사랑하고, 메종드파팡에서 판매하는 제품들에 자부심을 갖고 계신 게 저절로 느껴졌다. 다른 브랜드에서 느꼈던 대중적인 느낌에 거부감이 있었는데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자주 자주 들러서 지갑 털고 싶다(바람).






톰 포드

그레이 베티버

투스칸 레더





상당히 많은 종류의 향수들이 있었는데 하나하나 대충대충 맡아보았다. 그 중 마음에 들었던 것이 투스칸 레더. 그리고 베티버향이 있는지 문의하니 '그레이 베티버'를 보여주셨는데 이게 상당히 좋았다.

이름에 그레이를 넣은 건 참 귀신같은 네이밍 센스다. 딱 비를 머금은 먹구름이 떠오른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먹구름이 낀 날씨, 이파리가 거의 남지 않은 침엽수림에 물에 젖은 흙과 재가 깔려있는 풍경이다. 

그런데 이 향을 맘껏 즐기기엔 멈칫하게 되는, 자극적인 향이 조금 섞여있다. 물안개에 맵지 않은 연기가 있는 것처럼 섞여있는데, 좀 꼬릿하고 찝찔한 향이다. 하지만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아니 그걸 포함해서 깊이 들이마시고 싶을만큼 매력적이다.

투스칸 레더는... 가죽이 향기롭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아마 가죽향이 취향인가보. 바이레도에 갔을 때 마음에 드는 향이 죄다 가죽향이 섞인 것이었다(이름은 기억이 안 남). 잠이 잘 올지, 뿌렸을 때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죽향이라서 좋았음.





프레쉬

피그 애프리콧

사케











프레쉬의 향들은 대체로 직접적이었다. 이름과 거의 그대로 매치가 되는, 예상이 되는 향들. 그 중 예외인 것, 그러니까 '오묘한 향' 이 두 가지있었는데 그게 라이프와 사케였다.

하지만 라이프는 그다지 기억에 남지 않았으니... 향이 약하다. 너무 흐릿해서 무슨 향이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을 정도. 그러다 끝에서 두 번째로 맡은 향기가 '피그 애프리콧'이었는데, 내가 좋아하는 피그가 있어서인지 반가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케를 맡았을 때, '아!'하고 멈추었다. 무엇과도 비슷하지 않은 새로운 느낌이었다.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이중으로 되어있어 속을 감추고 있는 그런 인상의 향. 은은한 향이 나는 복숭아를 아주 부드럽고 깨끗한 흰 천으로 감싼 느낌인데, 별로 달진 않고 아주 편안하다(랑방 에끌라 드 아르페쥬의 노골적으로 달콤한 복숭아가 아니다. 그런 복숭아향 아주 극혐함). 복숭아가 두드러지지도 않아서, 그냥 '천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향이 나네'하고 킁킁대게 된다.

직원분의 말로 지속력은 4~5시간 정도라고 한다. 집에 와서 사케와 피그 애프리콧의 시향지를 다시 맡아봤는데 하나는 평범한 마린향이 났고, 다른 하나는 고소한 향이 나서 신기했다. 다른 시향지랑 섞여서 그런 향이 나는 것인가 했는데 아니었다. 이름을 안 써두어서 헷갈리지만 마린향은 아마 피그 애프리콧일 것 같고, 사케에서 고소한 잔향이 남은 것 같다. 사케에서 마린으로의 잔향은 연결이 잘 안 되는 느낌이라... 이렇게 특이한 향이 평범한 잔향을 남길리 없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추정.


시향은 아쿠아 디 파르마와 마찬가지로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에서 했다. 밝고 친절하셔서 참 좋았다. 


+2019/5/10 수정


인터넷에서 '독하다'는 평들이 많아 내가 잘못 맡았나하는 생각에 본점 아닌 다른 지점으로 다시 가서 시향을 했다. 그 날 후각이 피곤했던 것인지 뭔지... 정말 내가 그전에 맡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향이라 깜짝 놀랐다.  화장품 냄새와 알콜향이 뒤섞여 확 코를 찌르는 것처럼 강하게 들어온다. 맘에 안 들어서 참 다행이다. 그리고 피그 애프리콧은 단종되었다고 하던데 왜 압구정에서는 그런 말이 없었지...? 어쨌거나 처음으로 남겼던 사케의 시향기는 사실이 아닌 걸로.



르 라보

이리스 39






잔향으로만 시향을 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르 라보의 향들은 적절하게 여백이 있고 빈티지하다는 게 공통점이었다. 공간을 채우려는 야심이라도 있는듯 향을 뿜어내는 향수들에 반해서, 향이 어딘가 부서져있는 느낌이다(이런 추상적인 표현 정말 싫은데 어쩔 수가 없구나).


서너개 정도가 마음에 들었는데 이리스(아이리스), 리스(백합), 자스민이었나? 꽃향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 유명한 상탈도 물론 좋았지만 뿌리기보다는 디퓨저로 쓰고싶은 향기였다. 어나더, 암브레트 빼고는 대체로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방문한 곳은 가로수길 부티크였다. 한남동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자주, 뻔질나게 지나다닌 길가에 그렇게 조용히 자리잡고 있어서 당황했다. 직원분이 불친절한 건 아닌데 이상하게 대화의 티키타카/아어이다가 안 맞아서 다시 간다면 한남동에 방문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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