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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이디 버드(Lady bird)






이름은 존재를 정의한다. 사람의 이름 속에는 그의 정체성, 뿌리가 담겨있다. 옛날 귀족들이 이름에 폰(게르만식), 드, 데(프랑스식)를 넣어 자신의 신분과 영지를 드러냈던 것이나, 아랍인들의 긴 이름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할아버지의 이름이 포함되어있는 것처럼. <레이디 버드>에서 이름과 정체성에 관한 영화이다. 주인공 크리스틴이 본명이 아닌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원한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본명)을 버리고 스스로가 동경하는 것을 쟁취하려하는 소싯적의 방황을 그려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크리스틴'은 그녀가 선택하지 않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들을 대표한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살아내고 있는 지금의 나 자신. 크리스틴은 고향도, 외모도, 집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향인 세크라맨토를 벗어나 ‘뉴욕같은 곳’으로 떠나고 싶어하고, 모델같지 않은 외모가 불만스러우며, 마을의 크고 멋진 집을 동경한다. 반대로 스스로 지은 이름인 '레이디 버드'는  동경하는 삶을 쟁취하고자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잘 나가는 친구와 힙한 남친, 드림하우스에 살고 있는 자신이다. 


자신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을 부정하는 태도는 가족과의 갈등으로 귀결된다. 그녀의 본명은 부모가 지어주었을 것이며, 그녀의 외모라든가 집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모녀간의 애증관계를 중점적으로 비추는데, 어머니의 최선은 딸의 입장에서 '주어진 것'이며 어머니의 입장에서 딸의 최선 역시 '주어진 것'이다. 불평을 늘어놓거나 잔소리를 해봐도 소용이 없다. 바꿀 수 없는 둘 사이에서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나는 네가 최고의 모습이길(best version) 바랄 뿐이야.”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라고 하면?”


최선이라는 단어가 혼란스럽게 다가온다. 내게 지금 주어진 것과 최선의 것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거리가 벌어져 있는가? 최선은 내가 이룰 수 있는 최소한인가, 아니면 최대한인가? 나의 '최선', 그리고 상대방에게 요구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지점은 과연 어디일까? 

동경하는 것과 최선의 것 사이에서 화해의 방식은 의외로 간단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대로,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없어봐야 소중한 것을 안다고 하지 않는가. 지겹도록 익숙한 것들이 이제까지의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레타 거윅의 첫 연출작으로 무난하게 좋은 솜씨를 보여주었다. 영상물을 많이 접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매끄러운 그 느낌정도? 자전적 내용이 담겼다는데 역시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 자신에 가까운 것을 영화로 복제할 때 명작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그러나 이 영화는 명작이라기엔 조금 소박하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