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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두 개의 사랑(L'amant double, The double lover)



이런 영화 아주 좋다. 애매모호한 상징같은 거 넣어서 생각하게 만드는 거.

이 영화는 애매모호하더라도 얼개를 파악하면 대강의 구조가 보인다. 그다지 어렵지는 않다.

특히 주목하고 싶은 건 고양이 뱃지.



먼저 제목을 통해 가설을 세워보자.


두 개의 사랑이라면 욕망 또한 두 개일 것이다.

이 두 욕망은 클로에와 폴, 클로에의 여동생과 루이

이렇게 두 커플(?)의 사랑일 수도 있고,

클로에라는 하나의 존재가 두 욕망을 품은 것일 수도 있다.

 

 

 

클로에가 시달리는 복통에 대해 의사는 심인성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인 것으로 추측된다.

클로에가 흡수한 태아가 복통을 일으켜 클로에의 정신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이는 쌍둥이끼리의 대결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몇 번인가 생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또한 단순 생리혈이 아니라 쌍둥이끼리의 대결로 인해 흘리는 피를 암시한다.

게다가 클로에가 일한다는 미술관에는 

태아(보통의 태아가 아닌 기생형 쌍둥이)와 모양새가 닮은 미술품으로 가득하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그 모양새가 뚜렷해진다.

 

 

 

 

내가 파악한 이 영화의 테마란, 위에서 말한 '태아'와 같이

"살아있지 않은 듯 살아있으면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들" 이다.

우선 클로에의 복통이 그렇고, 루이의 존재 또한 그렇다. 영화 내내 루이는 마치 유령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클로에의 비밀을 어찌된 일인지 다 알고 있다. 여동생의 존재까지도.

따라서, 실존하는 인물로 보기 어렵다는 뜻.

루이의 존재는 허구일 것이고, 이 허구는 여동생이 미치는 영향력에서 기인한다.

무의식적으로 클로에는 여동생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루이의 존재뿐만 아니라 영화 속의 공간 등 곳곳에서

"살아있지 않은 듯 살아있으면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들"이 클로에를 위협하고 압박한다.

이웃집 아주머니의 딸의 방, 산드라의 방 등... 대결의 양상이 나타난다.

 

 

 

 

이웃집 아주머니의 딸은 영화 속에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20대부터 양로원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빈 방'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나리오상의 장치라기엔, 영화의 주제와 강하게 연결되는 부분이다.

딸의 방에는 박제된 고양이들이 많이 있다. 살아있지 않은데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아주머니는 그 고양이 박제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쓰다듬고,

오히려 살아있는 고양이를 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정색한다.

"살아있지 않은 듯 살아있으면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들"로 가득한 공간이며, 

클로에를 불안하게 만들고 위협한다.

 

 

 

 

산드라 이야기는 다른 요소들과 독립시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클로에의 자책감이 드러나는 이야기이기때문인데,

이야기 자체에 클로에가 만들어낸 허구가 섞여있는 것 같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딸의 친구한테 잡년이라고 하는 게 이상하고...

산드라가 분노한 표정으로 클로에를 바라보는 부분도 환각처럼 연출되어있다.

이 이야기의 메시지는 클로에가 증오하는 어머니의 행동,

'아버지를 특정하기 어려운 임신'을 자행했다는 것에 대한 자기혐오와 자책감이다.

물론 실제로 임신을 한 것은 아니지만, 두 명의 남자와 사랑을 나눈 것이니까.

그래서 '너 그 둘과 즐긴거지? 잡년아' 소리를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살아있지 않은 듯 살아있으면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 즉 산드라가 그녀를 압박한다.

산드라는 제대로 말하거나 보지 못하면서 겨우 살아있다. 루이는 '산 송장'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산드라 이야기는 두 개체 중 하나를 죽이는 계기가 된다.

루이가 죽자 클로에의 여동생도 기생하고 있던 몸에서 분리된다.

 

 

 

마지막으로... 왜 고양이인가?

물론 쌍둥이라는 소재에 있어 관련성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 고양이는 성적인 난잡함을 포함해 부덕함의 화신 혹은 상징처럼 등장한다.

엄마의 고양이 브로치- 엄마의 난잡한 과거,

루이의 고양이-루이와의 관계(바람),

밀로-폴과의 관계(두 욕망).

이 중 밀로의 경우에는 폴이 좀 싫어한다.

클로에가 난잡한 여자이길 바라지 않기때문에, 특히 침대에 올라오는 걸 싫어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밀로의 시선은 무척이나 신경쓰인다.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영화 속에서 몇 번 등장하기도 하고.

뭔가 불안감을 일으키는 이 고양이의 시선은 클로에의 여동생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 이외의 존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고양이.

여동생은 그 동안 쭉 클로에의 몸 속에서 그 시간을, 성관계하는 시간까지도 공유한 셈이다.

고양이의 시선=제3자의 존재=클로에 여동생의 존재를 암시.

그래서 성적 난잡함과도 연결이 되고, 폴이 밀로를 싫어하는 이유가 된다.

결국 고양이의 존재는 불안과 자책이 끝나지 않음을 암시한다.

 

 

 

야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영화였는데 야하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성행위가 성적인 욕망이라기보다는 생명의 잉태, 

생명에의 욕망이라고 느꼈기때문이다.

 

영화의 스토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따져본다면 두 가지다.

태아가 욕망을 가질리 없다는 가정 하에, 

클로에가 두 개의 욕망을 품었다는 데에서 오는 불안과 죄책감을 다루었다는 스토리.

태아의 욕망이 분명히 있었다는 가정 하에

쌍둥이의 욕망이 대결을 했다는 스토리.

 

그냥 스토리도 두 개인 게 정체성인 작품으로 치자...